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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글/생각

1987, 그리고 박종철 열사

칸나일파 2018. 1. 14. 23:08
(2006년 1월 14일에 썼던 글이다. 1월 14일은 박종철 열사 기일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영화 <1987>이전부터 박종철 열사라는 창을 통해 1987년을 기억했었구나.)

1.
학생운동을 시작했을 무렵, 학생회실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쌓여있던 수많은 책들. 지난날 학생운동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수많은 팜플렛과 소책자들. 그 가운데 '그대 온몸 깃발되어'라는 책이 있었다. 그것은 합법적인 출판이 불가능하던 시절에 나왔던 해적판 박종철 열사 평전이었다.

2.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싸움이다. 한 편, 역사는 망각과 선택을 둘러싼 싸움이기도 하다.

과거사 청산을 둘러싸고 말들이 많은 요즘, 전쟁의 상처와 기억이란 주제로 고민이 많은 요즘, 부쩍 그런 생각이 늘었다.

사람들은 달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열사 추모제 때마다 기조를 무엇으로 할 지 다툼을 벌였다. 사회자들은 적절히 용어들을 골라 쓰려고 애를 썼다. 어떤 사람들은 '수구세력 청산'을, 어떤 사람들은 '자주민주통일'을, 또 어떤 사람들은 '노동해방'을, 또 어떤 사람들은 '인간해방'을 외쳤다. 각자 조직 성향에 따라, 인식에 따라 열사들의 행적을 취사선택해서 기억했다. 망각과 선택을 둘러싼 싸움은 때론 거친 분위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것을 알아서 였을까? 추모제 때마다 아버지는 '내가 여기에 오신 분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그저 계속 종철이를 기억해주시는 분들에게 감사드릴 따름입니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한나라당에 들어갔다는 박종운 씨(박종철 열사가 끝까지 거처를 대지 않았던 그 사람) 역시 늘 그 추모제 자리 한 켠을 지키고 있다.

처음 학생운동을 배울 때 그는 내게 '투사'였고,
조직운동을 시작했을 때 그는 내게 '사회주의자'였다.
그렇다면 그는 내게 지금 무엇하는 누구인가? 아니 나는 그를 무엇하는 누구로 기억하려 하나?

3.
박종철 열사는 과학생회장을 지낼 때 과방 칠판에 '개인주의 귀신 물러가라'고 써두었을 정도로 개인주의를 싫어했다. 자기 한 몸 돌보는 것을 이기적인 요구로 여겨 항상 남을 먼저 도왔던 휴머니스트이기도 했다. 또 그는 써클에 참여하여 레닌을 공부하고, 자본과 권력을 날카롭게 비판하던 사회주의자이기도 했으며, 민주주의자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잣대로 뭔가를 끄집어내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지난날의 과학적 인식과 운동방식으로 오늘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그저 이 날 하루 나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면 된다.
내가 생각하는 최선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지 생각하면 된다.
그가 인간에게 희망을 품었다는 것, 그래서 다른 세상을 꿈꿨다는 것, 그리고 행동했다는 것을 기억하면 된다. 그 이상의 해석은 모두 자기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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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박종철 열사 추모시)


오늘 우리는 뜨거운 눈물을 삼키며 솟아오르는 분노의 주먹을 쥔다

차가운 날
한 뼘의 무덤조차 없이
언 강 눈바람 속으로 날려진
너의 죽음을 마주하고,
죽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 곁에 맴돌
빼앗긴 형제의 넋을 앞에 하고
우리는 입술을 깨문다

누가 너를 앗아갔는가
감히 누가 너를 죽였는가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우리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다
너는 밟힌 자가 될 수 없음을
끝까지 살아남아 목청 터지도록 해방을 외칠
그리하여 이 땅의 사슬을 끊고 앞서 나아갈 너는
결코 묶인 몸이 될 수 없음을

너를 삼킨 자들이
아직도 그 구역질나는 삶을 영위해가고 있는 이 땅, 이 반도에
지금도 생생하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너
철아,
살아서 보지 못한 것, 살아서 얻지 못한 것
인간 자유, 해방
죽어서 꿈꾸어 기다릴 너를 생각하며
찢어진 가슴으로 약속한다
거짓으로 점철된 이 땅
너의 죽음마저 거짓으로 묻히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말하리라
빼앗긴 너를 으스러지게 껴안으며 일어서서 말하리라
오늘의 분노, 오늘의 증오를 모아
이 땅의 착취,
끝날 줄 모르는 억압,

숨쉬는 것조차 틀어막는 모순 덩어리들,
그 모든 찌꺼기들을
이제는 끝내주리라.
이제는 끝장내리라.

철아,
결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우리의 동지여,
마침내 그 날
우리 모두가 해방춤을 추게 될 그 날
척박한 이 땅 마른 줄기에서 피어나는
눈물뿐인 이 나라의 꽃이 되어라.

그리하여 무진벌에서, 북만주에서 그리고 무등에서 배어난
너의 목소리를 듣는 우리는
그 날,
비로소 그 날에야
뜨거운 눈물을 네게 보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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