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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etc

편파적인 정도전 시청 후기.

칸나일파 2014. 8. 7. 03:14

1. 
아침/저녁 막장 드라마가 주부층을 대상으로 하는 것처럼, KBS 정통사극은 장년층 남성을 대상으로 한다. 매번 비슷한 권력투쟁 구도, 느린 전개, 유사한 캐스팅, 전형적인 문어투 대사와 뻔한 행동묘사 등 재미있는 요소가 하나도 없었다. 유일하게 본 KBS 사극은 [불멸의 이순신]으로 감옥에 있을 때 채널선택권이 없어 억지로 본 게 전부였다. 
반면, 2000년대 중반 MBC는 다모-대장금-궁으로 이어지는 퓨전사극을 선보여 사극의 고정관념을 깼다. 다양한 소재 발굴, 파격적인 역사 해석, 대화/의상/무대장치 등 현대적 요소의 과감한 차용, 빠른 전개 등으로 사극과 일반드라마의 경계를 허물었다. 
정도전은 그 사이에서 절묘하게 줄타기를 해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KBS에서 낸 정통사극 시리즈 중에서는 가장 잘 만들어졌다는 느낌. 특히 인물 하나 하나가 생명력이 넘쳤다. 정몽주-충신, 정도전-책사+혁명가, 이인임-수구꼴똥 같은 도식이 무색하리마치 복잡한 사람 심리를 잘 그려냈다. 매순간 모든 인물에게 일정 정도 감정이입을 하게될 만큼 모든 인물은 충분히 합리적으로 고민하며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헤쳐나갔다. 

2. 
그래도 역시 내 코드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남성의 복수극이란 측면이었다. 복수극을 좋아한다. 복수는 완성될 수 있는가? 어떻게? 라는 주제는 항상 흥미롭다. 여성복수극의 전형은 아주 긴 세월을 들여 적과의 동침에 성공하고 끝내는 마음을 얻은 후 상대를 파산시키는 과정을 밟는다. 그리고 종국에는 복수에 성공한 주인공 역시 자멸(자살)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남성 복수극은 아주 간단해서 나쁜놈을 찾아 물리력으로 아작을 내는 거다. 그리고 자신도 또 다른 이에게 아작이 나면서 끝이 난다. 폭력의 무환순환. 이런 전형성은 흥미가 떨어진다. 
가령 여성복수극인데 처참하게 도륙을 하거나(킬빌, 김복남 살인사건) 남성복수극인데 종국엔 심리적으로 무너진다든지(마왕) 하는 경우엔 마구 케미가 돋는다. 

정도전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31회 이인임의 최후를 다룬 대목이다. 복수에 성공하고도 마지막 순간까지 악담을 쏟아붓는 정도전에게 이인임은 "무척 고통스러울 것이외다. 내 저승에서나마 똑똑히 지켜보겠소이다. 삼봉"이라고 대답하자 정도전은 당혹스런 눈빛이 역력하다. 가장 저주했던 대상이 자신의 고통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사실. 정도전의 당혹스러움은 이인임의 죽음이 복수의 완성이 아니라 단지 복수의 순환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 여기에 복수의 이중성이 있다.

마왕의 마지막회가 강하게 떠오르는 순간. 주지훈은 자신의 형을 죽게한 엄태웅에게 복수한다. 엄태웅의 모든 것을 파괴한 주지훈은 엄태웅에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자신이 마련해 둔 서사를 행복하게 마무리 지으려 한다. 그런데 엄태웅은 오히려 주지훈을 끌어 안는다. "나처럼 괴롭구나. 너도 나처럼 지옥에 와 있어. 나보다 더한 고통 속에 있어. 내가 널 이렇게 만들었어. 널 지옥으로 이끈 건 나야. 널 미치도록 증오하면서도 널 보면 가슴이 아프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살아. 살아있는 게 지옥같아도 있는 힘껏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와."


드라마 오덕인 내가 손에 꼽는 명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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