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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etc

파씨의 입문

칸나일파 2014. 8. 7. 03:22
아주 오랜만에 소설책을 한 권 읽었다. 황정은 소설집 <파씨의 입문>. 소설은 참신하지만 뭔가 부족하다. 뭔가 부족한 느낌은 서사가 부족한데서 오는 것 같다. 집요하게 어떤 느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지만 뚜렷한 스토리나 인과관계는 별로 없다. 애초에 스토리를 구성할 마음도 많이 없었던 것 같다. 어떤 상징적인 장면이 하나 떠오르면 반복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을 통해 느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지만 그 상황은 어떻게 비롯되었고 어떻게 결론나는가에 대해 별 말이 없다. 소설가는 오직 죽음에 대해, 죽음을 매개로한 외로움과 쓸쓸함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만이 자신을 살게 한다는 듯 작정하고 외롭고 쓸쓸한 소설을 쓴다. 

단편집에 있는 모든 소설이 죽음을 주제로 다루지는 않지만 소설 전반에 죽음의 기운이 아주 짙게 배어 있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심지어 죽어도 죽은 것 같지 않은. 살아가는 것도, 살아지는 것도 아닌, 그 무엇으로도 부르기 힘든. 이 세상은 실체없는 유령들로 가득차 있다. 

가장 오래도록 생각에 남는 작품 <대니 드비토>는 죽음 이후에도 형태없는 원령이 살아남아 집안을 배회한다는 가정 아래 쓰여졌다. 원령은 그가 사랑했던 존재들 곁을 맴돌지만(심지어 붙어있기도 하지만) 살아있는 것들은 원령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원령은 "자기가 먼저 죽으면 혼자서 살아갈 자신이 없어." 라고 말했던 연인이 또 다른 사랑을 만나 결혼하고, 애를 낳고, 늙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나는 죽은 뒤에 뭔가 남는다거나, 다시 태어난다는 거, 믿지 않아."라던 연인의 말은 원령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부메랑이다. 그러니 하다못해 "한 쌍의 원령으로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원령의 희망은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 그렇게 원령은 죽음 이후에도 지독한 고독과 외로움에 시나브로 사그러져 간다. 그리하여 원령은 연인이 죽은 이후에는 원령조차 남지 않기를 소망하며 한정없이 묽고 무심한 상태가 되어간다. 

이토록 쓸쓸하고 외로운 소설집이다. 죽음 이후의 관계에 대해,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이에게 희망하는 것에 대해, 죽은 사람이 여전히 무언가를 남겼을거라는 믿음에 대해, 사람들이 상상으로 지어 놓은 모든 욕망을 지독하고 집요하게 허물어뜨린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왜 책을 읽을수록 마음이 차분해 지는지. 왜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솟구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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