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지에 들고 온 소설책은 김연수의 . 시공간을 되돌리며 끝끝내 해석되지 않는 것들을 잡으려 노력했던 김연수 소설은 에서 절정을 찍었던 것 같다. 적당히 대충 갈무리하고 스스로 타협하며 마음 편한 길을 갈법도 한데 그는 절대 후일담 소설에 머무르지 않고 갈 때까지 가보기로 한 사람처럼 지난 시공간을 끊임없이 되돌리고 되돌려, 다시 해석했다. 그래서인지 여행지에서만 느끼는 알 수 없는 고요함이 밀려들 때, 김연수 소설을 읽는다. 지난 여행지에서는 를 읽었던가? 정신없던 하루 일과가 끝나고 숙소에 와 누우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선 소리에 문득 내가 전혀 해석할 수 없는 세계 속에 들어와 있음을 느낀다. 그때 타임리프를 한 듯한 그의 소설을 읽으면 그 외로움과 낯설음이 배가되어 역설적으로 여행이 더 여행..
- 2006년 작성한 글 1. 야생의 여성성이라는 도발적 문제제기 정확히 구분 짓는 것은 위험하지만 대체로 80년대 여성소설이 민중성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여 자본주의나 가부장제와 같은 거대담론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90년대 여성소설은 여성억압의 원인을 좀 더 미시적인 권력관계나 다양한 생활문화 영역 속에서 찾으려 노력했다. 동시에 그 동안 수동적이고 나약한 것으로만 받아들여졌던 여성성을 긍정하고 재규정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전개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여성 고유의 내면심리, 사고방식, 생활방식 전반에 관한 논의가 넘쳐나고 있으며, 이제 여성주의 담론이 당당히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여성문학 역시 문학의 주요한 영역으로 그 자리를 굳혔다.2000년대 들어 연애나 결혼 문제를 쿨한 감수성으로 그려내거나..
- 2006년 작성한 글. 1.영화 [살인의 추억]을, 몇 년 전에 봤을 때, 송강호가 첫번째 희생자를 발견했던 그 장소에서, 하염없이 슬픈 눈으로 빈 공간을 응시하는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순간, 난 그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했다. 줄줄흐르지도 않고, 엉엉 소리가 나지도 않는, 그 눈물은, 꼭 그럴 때 그렁그렁하게 맺힌다. 그리고 [빛의 제국]을 읽으면서, 갑자기, 그렇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송강호의 눈빛이 떠올랐다. 맹목적이었든, 합리적이었든, 지나간 열정은, 이유없는 회한과 서글픔을, 아주 오랫 동안 남긴다. 2.후일담 소설이 많았다. 90년대 중반에는 부정하든, 긍정하든, 타협하든, 외면하든, 부채의식이 시달리든, 계속 지난 날들을 의식했다. 오랫동안 거부감 때문에 외면했었던 무라카..
- 2006년에 작성된 글1. 작가 소개 성석제(成碩濟) : 1960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86년 [문학사상]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1994년 짧은 소설 모음집 를 내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95년 [문학동네]에 단편소설 를 발표했으며, 1997년 단편 으로 제30회 한국일보문학상을, 2000년 소설집 으로 제13회 동서문학상을, 2001년 단편 로 제2회 이효석문학상을, 2002년 소설집 로 제3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소설집으로 , 장편소설로 등이 있다. 2. 줄거리 사내가 탄 차는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떨어지는 중. 지상 100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는 자동차가 바닥에 닿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4.5초. 사내는 그 시간 동안 지난 자신의..
- 2007년에 작성한 글 1. 나도 소설을 왜 읽는 지 많이 궁금했다 입학 당시 가입했던 문학 동아리는 이미 균열의 조짐이 드러나고 있었다. 세미나에서 다루는 소설과 평상시 즐겨 읽는 소설의 간극은, 딱 그 만큼 현실에서 욕구 차이를 드러냈다. 여전히 몇몇은 운동에 관심을 보였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았다. 끝끝내 지키려는 사람은 갈수록 소수였고 그나마도 소설을 매개로한 건 아니었다. 소설이 진실을 알리고, 역사를 가르치고, 현실을 비판하고, 그래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밀알 한 톨 만큼이라도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은 신앙 같은 것이었다. 그래야만 한다는.그래서 그랬나. 그 때는 왜 그렇게 후일담 소설들이 많이 나왔는지 이해도 못하니까, 비관이 난무해도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를 읽으면서 뭔가 잃었다고..
- 2007년에 작성한 글. 1. 소설을 읽다가 '앗, 이거 내 얘기다.' 싶은 소설을 만나면 몰입하든지 도망치든지. 2. 지나치게 짧고 건조한 문장들. 인과관계 없이 계속 나열한 사건들.너무나 많은 상처가 일상이 되어버린 탓에 슬픔은 언제나 속으로만 배어들고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고, 외로워도 외롭다고 말하지 않고,더 좋아질 거라고 말하지도 않고, 더 좋아질 거라고 기대도 하지 않고,그리워도 그립다 말하지 않고그냥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 마음을 열 듯 열지 않고, 마음을 닫을 듯 사람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답답해/답답해/답답해/답답해/미칠 것처럼 답답해그런데 공감이 가는 걸 어떡해? 3.희망이 없다 말하는 거 같지는 않다.위로받을 수 없다 말하는 거 같지는 않다.누구랑도 소통..
- 2009년에 작성한 글 1. 신인 소설가 주이란이 조경란의 [혀]가 자신의 작품을 베꼈다가 주장하면서 한 동안 화제가 되었던 작품. 표절 논란이 없었다고 해도 이 소설, 즉 조경란의 [혀]를 읽었을 것이다. 자극적인 소재에다, 그 소재를 둘러싸고 벌어질 사태의 전개가 자못 궁금하기도 했고 (난 추리적인 요소가 강한 소설, 즉 분석해야 하고 예측해야 하기 때문에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을 좋아한다.) 음식을 소재로 인간의 심리를 어떻게 분석할지 작가의 관점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읽어야 할 책 목록에만 저장해 두었다가 조경란과 주이란의 [혀]를 동시에 사서 읽었다. 2. 미식가라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시시로 침이 고일 것이며, 때로는 식탐을 참지 못해 음식을 먹으면서 이 책을 읽을지도 모르겠다..
- 2009년에 작성한 글 얼마 전 씨네21에서 에 대한 영화평을 보고 이 번 만큼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에서 최근 까지 그와 그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치않게 들려왔다. 남이 평가하면 덩달아 평가하고 싶어지는 심리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를 끝내 안봤던 것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로 표상되는 미국식 정의와 착한 마초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휴머니즘과 정의감으로 무장한 보수라해도 강자와 약자의 논리를 버릴 수 없는 한 그게 그거다. 개화한 마초와 여성의 관계 역시.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많이 힘들었다. 씨네21에서 보았던 영화평 때문에 처음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미국 보수주의가 지난 단점까지도 모두 떠안고 가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유언장을 미리 보는 것 같다는. ..
아주 오랜만에 소설책을 한 권 읽었다. 황정은 소설집 . 소설은 참신하지만 뭔가 부족하다. 뭔가 부족한 느낌은 서사가 부족한데서 오는 것 같다. 집요하게 어떤 느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지만 뚜렷한 스토리나 인과관계는 별로 없다. 애초에 스토리를 구성할 마음도 많이 없었던 것 같다. 어떤 상징적인 장면이 하나 떠오르면 반복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을 통해 느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지만 그 상황은 어떻게 비롯되었고 어떻게 결론나는가에 대해 별 말이 없다. 소설가는 오직 죽음에 대해, 죽음을 매개로한 외로움과 쓸쓸함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만이 자신을 살게 한다는 듯 작정하고 외롭고 쓸쓸한 소설을 쓴다. 단편집에 있는 모든 소설이 죽음을 주제로 다루지는 않지만 소설 전반에 죽음의 기운이 아주 짙게 배어 있다. 살아도 산..
1. 치과 옆에 헌책방이 있다. 덕분에 치과에 갈 때마다 헌책방을 들른다. 헌책방은 아주 오랜 만이다. 이십대 후반에 습관적으로 헌책방에 갈 때가 있었다. 모든 게 좋았다. 좁고 어두운 통로, 오래된 책냄새, 조금 텁텁한 먼지 냄새, 무심한 듯 쉬크한 주인장, 열에 아홉 제목을 알 수 없는 재즈나 클래식, 그리하여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한 편안함. 헌책방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어릴 적 다락방으로 옮겨간다. 엄빠는 당시 교육 때문에 서울로 이사온 대개 부모처럼 백과사전, 전기전집, 국내소설전집 등 엄청난 양의 전집류를 사두었다. 보통 그런 것은 별 의미없이 책장 한 곳을 차지하다 조용히 먼지가 앉으면서 잊혀져 간다지만. 엄빠가 종일 집에 없어 심심했던 나는 다락방에서 책을 뒤지며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거기에..
중3 때 등장한 서태지는 말그대로 대세였다. 야자할 때 워크맨 듣고 있는 애들 대부분 서태지 앨범이 장착되어 있을 정도였다. 1집 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분위기가 점점 달아오르더니 2집 '하여가' 때는 사방이 온통 서태지 천지였다. 지금이야 음반은 아이돌 1등 만들려고 공구하는 거 말고(10만장 넘기는 걸그룹은 소시, 퉤니원, 카라 정도 뿐이다.) 시장이 다 죽다시피 했지만 당시는 좀 잘나가면 100만장 넘기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동네마다 음반 가게 한둘쯤은 있기 마련이었는데. 동네 음반 가게에 줄서는 걸 본 건 서태지 2집 발매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발매 첫 날 1차 주문량이 다 나갈 정도였다. 서태지 외에 듀스, R.ef, 솔리드 등 몇몇 그룹들이 아웅다웅하고 있었고 신승훈과 김건모가 ..
1. 아침/저녁 막장 드라마가 주부층을 대상으로 하는 것처럼, KBS 정통사극은 장년층 남성을 대상으로 한다. 매번 비슷한 권력투쟁 구도, 느린 전개, 유사한 캐스팅, 전형적인 문어투 대사와 뻔한 행동묘사 등 재미있는 요소가 하나도 없었다. 유일하게 본 KBS 사극은 [불멸의 이순신]으로 감옥에 있을 때 채널선택권이 없어 억지로 본 게 전부였다. 반면, 2000년대 중반 MBC는 다모-대장금-궁으로 이어지는 퓨전사극을 선보여 사극의 고정관념을 깼다. 다양한 소재 발굴, 파격적인 역사 해석, 대화/의상/무대장치 등 현대적 요소의 과감한 차용, 빠른 전개 등으로 사극과 일반드라마의 경계를 허물었다. 정도전은 그 사이에서 절묘하게 줄타기를 해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KBS에서 낸 정통사극 시리즈 중에서는 가장 ..
0. 은 친구 말대로 조금 오글거리기는 하지만 몇 가지 이유로 아주 재밌게 읽었다. 김애란에 대한 편애, 성장소설에 대한 선호(죽음과 대면하는 성장소설이라니..), 어쩐지 최근에 가까워진 병/몸/죽음과 같은 단어에 대한 궁금증. 1.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가 거의 없었고 입원한 경험도 없다. 그냥 건강한 몸을 믿는 편이었고 대체로 알아서 회복했다. 약도 거의 먹은 적이 없었다. 감기에 걸리면 일부러 약을 안 먹기도 했다. 주로 이열치열로 이겨냈다. 두툼한 옷을 입고 보일러를 빵빵 틀고 이불은 잔뜩 뒤집어쓰고 땀을 뻘뻘 흘리며 자고 일어나면 나았다. 자전거를 타면서 크고 작은 사고가 여러 번 났는데 그 중에 두 번 정도는 꽤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 때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고 다시 몸은 제자리로 돌아왔..
.. 우리는 모두 헛똑똑이들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 아는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 처지인데도 우리가 오래도록 살아 노인이 되어 죽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김연수, 중에서 너무 너무 오랜만에 소설을 읽다가, 오랜만에 마음을 건드린 구절이 읽어 옮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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