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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의 N.EX.T

칸나일파 2014. 8. 7. 03:16
중3 때 등장한 서태지는 말그대로 대세였다. 야자할 때 워크맨 듣고 있는 애들 대부분 서태지 앨범이 장착되어 있을 정도였다. 1집 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분위기가 점점 달아오르더니 2집 '하여가' 때는 사방이 온통 서태지 천지였다. 지금이야 음반은 아이돌 1등 만들려고 공구하는 거 말고(10만장 넘기는 걸그룹은 소시, 퉤니원, 카라 정도 뿐이다.) 시장이 다 죽다시피 했지만 당시는 좀 잘나가면 100만장 넘기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동네마다 음반 가게 한둘쯤은 있기 마련이었는데. 동네 음반 가게에 줄서는 걸 본 건 서태지 2집 발매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발매 첫 날 1차 주문량이 다 나갈 정도였다. 

서태지 외에 듀스, R.ef, 솔리드 등 몇몇 그룹들이 아웅다웅하고 있었고 신승훈과 김건모가 있었지만 학생들에겐 서태지가 거의 신급이었다. 그런 와중에 우리반에서 넥스트(N.EX.T)를 흠모하던 애가 딱 둘이었는데 나와 내 짝이었다. 그리고 바로 우리 뒷자리에 "한국 음악은 쓰레기"라는 지론을 갖고 있었던 비틀즈 광팬이 있었다. 우리 셋은 서태지 빠들을 씹을 때는 한 편이 되었다가 이내 편을 갈라 넥스트가 최고니 비틀즈가 최고니 떠들어댔다. 다 부질없는 동어반복이었지만 우리는 그게 일종의 유희성 관용어구(idiom)의 같은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냥 그런걸로도 즐거울 수 있었으니. 

Home-Being-World-Space 로 이어지는 장구한 이야기 스케일과 흐름은 물론 철학적인 가사(신해철 철학과 중퇴), 현란한 신디사이저, 엄청난 세션(김세황의 기타는 정말...), 대마전력으로 인한 신비주의 등등 평론가들에겐 전반적으로 저평가 되어 있고, 그게 주로 허세와 후까시 때문이라지만 그걸 커버하고도 남을 독보적 존재감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차피 서태지나 넥스트는 완전한 창조자라기보다는 선진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여 한국적 상황에 잘 녹여낸 얼리어답터나 수재에 가깝다. 그런데 굳이 평을 하자면 그 점에서 넥스트가 훨씬 뛰어났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신해철이 처음 등장한 게 1988년 대학가요제에서 '그대에게'를 불렀을 때인데. 주현미, 현철이 짱먹던 시절에 기성가요계보다 몇 갑절은 시대를 앞서간 신디사이저 음악을 들었을 때 그 충격을 잊지 못한다.(확실히 신해철이 노래는 못한다. 저음이 엄청 매력적이긴 하지만)

아무튼 어떤 그룹에 광적으로 매달려보기는 그 때가 유일했다. 엄청 싫어하는 짓인데 방에 넥스트 포스터를 붙여두었고 남들은 존재조차 모르는 앨범을 포함하여 넥스트가 관련된 모든 앨범(싱글, 정규, 라이브, OST, 컴필레이션 등등)을 다 사모았다. "The return of N.EX.T"에 포함된 껍질의 파괴의 시끄러운 기타 사운드를 들으며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로 잠이 들었다. 짝하고 넥스트 음악을 서로 테잎에 골라 녹음해 선물하며 듣곤했다. 것두 당시에 500원하던 SKC 녹음테잎(일명 공테이프)보다 서너배는 비싼 고음질의 일본 공테잎을 사서 녹음했다. 노란 병아리 얄리 내가 죽였다는 멘트가 정말 녹음되었는지 들어보려고 테잎 이면을 감아 들어보기도 하고 O(무)1(한)궤도(OrBit)에서 015B라는 이름을 지은 정석원은 신해철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는 둥. 그렇게 소설을 써가며 둘이서 마냥 즐거워했고 온갖 허구적 이야기를 긁어 모아 하나의 세계를 구축했다. (엄정화 데뷔곡인 눈동자를 신해철이 작곡했다. 또 가수 윤도현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시절 정글스토리란 영화에 출연했는데 그 OST도 신해철이 만들었다. 당시 OST로서는 엄청난 수작이었다. 그리고 윤상하고 "NO DANCE"란 테크노 앨범을 내기도 했고...정말 수많은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러다 넥스트는 1997년 12월 31일에 해체되었다. 해체콘서트가 올림픽 제조경기장인지 역도경기장인지에서 열렸었다. 누나가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그마저 무시하고 친구랑 콘서트에 갔었다. 김세황이 누워서 이빨로 기타를 물어 뜯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뒤로 신해철은 테크노에 심취해서 크롬이란 이름으로 앨버을 여러장 냈다.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훌륭한 앨범이다. 신해철이 새로운 음악을 얼마나 빠르고 훌륭하게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는지 알 수 있는 앨범인데, 당시엔 의리로 사긴 했지만 많이 듣지는 않았다. 너무 앞서 나갔다 싶을 만큼 당시엔 조금 난해했다. 그리고 그룹을 재결성하기도 했지만 이미 내가 동경하던 세계는 과거에 남겨진지 오래였다. 그 뒤로는 가수에게 열광하는 일도 없어졌다. 그래도 가끔 넥스트 음악을 들을 때면 묘한 설레임에 빠진다. 최근에는 신해철이 신곡을 낸다하여 간만에 그 시절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다시는 그럴 일이 없겠으나 그런 아기자기한 재미가 그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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