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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etc

헌책방

칸나일파 2014. 8. 7. 03:20
1.
치과 옆에 헌책방이 있다. 덕분에 치과에 갈 때마다 헌책방을 들른다. 헌책방은 아주 오랜 만이다. 이십대 후반에 습관적으로 헌책방에 갈 때가 있었다. 모든 게 좋았다. 좁고 어두운 통로, 오래된 책냄새, 조금 텁텁한 먼지 냄새, 무심한 듯 쉬크한 주인장, 열에 아홉 제목을 알 수 없는 재즈나 클래식, 그리하여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한 편안함. 

헌책방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어릴 적 다락방으로 옮겨간다. 엄빠는 당시 교육 때문에 서울로 이사온 대개 부모처럼 백과사전, 전기전집, 국내소설전집 등 엄청난 양의 전집류를 사두었다. 보통 그런 것은 별 의미없이 책장 한 곳을 차지하다 조용히 먼지가 앉으면서 잊혀져 간다지만. 엄빠가 종일 집에 없어 심심했던 나는 다락방에서 책을 뒤지며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거기에선 초원의 동물들이 운동회를 열기도 했고, 이상과 윤동주와 이육사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어둠의 시대를 내달리기도 했으며, 숱한 왕조가 무너졌다 세워지기를 반복했다. 어쩌다 국어시험 때문에 한 번쯤 첫 페이지 정도만 쳐다보고 말았을 국경의 밤 같은 작품을 노트에 전부 옮겨 적기도 했다.(엄청 길다.) 그러다 우연히 걸리는 선데이서울은 덤이었다. 

2. 
헌책방을 한 바퀴 휘 둘러본 후 대략적인 배치를 파악했다. 그리고는 소설책을 분류해둔 곳으로 가 집중탐색에 들어갔다. 책을 잘 안보게 된 지는 꽤 되었지만 그나마 보는 책들은 대부분 소설이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발길이 움직였다. 일단 빠른 속도로 제목을 훑어내려가며 선호하는 작가의 이름을 찾는다. 문득 책읽기의 폭이 얼마나 빈약했는가가 드러난다. 이름을 아는 작가 목록은 이내 바닥이 나고 책찾기는 그 목적을 상실한다. 

책장에 꽂힌 책들은 거칠게나마 가나다순으로 정열이 되어 있었지만 아주 체계적이지는 않았다. 애초에 제대로 된 분류는 불가능해보였다. 공간은 너무 협소했다. 채 진열을 못한 책들이 바닥마다 수북하게 쌓여 있다. 책을 찾는 행위는 체계적인 검색에서 일종의 보물찾기가 되었다가, 종국에는 분류가 잘 된 것도 아니고 안 된 것도 아닌 헌책방을 닮아 오락가락한다. 

기대하지도 않은 순간 재밌게 읽었던 책을 찾았을 때, 읽고 싶었으나 읽지 못했던 책을 만날 때, 처음 보는데도 뭔가 묘한 끌림을 주는 책을 만날 때마다 가벼운 설레임이 인다. 모든 책을 다 일별하지 않고는 왠지 눈 앞에 있는 보물을 놓칠 것만 같은 조바심이 생긴다. 자연스럽게 안타까운 마음이 생긴다. 공간이 조금만 넉넉했다면 훨씬 더 체계적인 분류가 가능했을텐데. 체계적인 분류가 되면 검색도 손쉬워지고, 네트워킹이 된다면 좀 더 쉽게 책을 매개로 한 만남이 이루어질텐데... 바닥에 쌓인 책이 또 다른 책을 덮고 책장을 가려 일부는 애초에 제목을 볼 수가 없다. 물어보기도 애매하다. 이 많은 책 속에서 무엇을 찾아달라고 하기가...

그럼에도 기분 좋게 첫 날은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인생>을 샀다. 

3. 
그렇게 여러 번을 들리고 나니 이제 비슷한 곳에서 비슷한 종류의 책들을 조금 수월하게 찾아낸다. 그리고 찾으려 했던 책은 생각만큼 잘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헌책방은 여전히 재밌다. 편협했던 독서편력에도 불구하고 제목만 보면 그 느낌들이 오롯이 살아남아 지난 시절이 꽤나 풍요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누가 읽으면 참 좋아할 거 같은데...'란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내 느낌이 맞았는지 선물을 해주고 나면 알게 되겠지 하고 생각하니 기분이 더 좋아진다. 그래서 오늘은 이미 읽은 책 두 권을 선물용으로 사들고 왔다. 고작 6천원에 두 사람 선물을 샀고, 그 두 사람이 책을 선물받고 분명 아주 기뻐할 생각을 하니 모처럼 되게 소박한 기쁨에 심취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우연히 저자 이름 중에 원빈 스님을 찾고는 빵터진건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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