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2017. 08. 30. 상암동 MBC 로비


이근행 MBC 노조 조합원(전 위원장)

 

"여러분에게 힘이 될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참 판단이 어렵습니다. 제가 전임 위원장이 아니라 조합원으로서 또 똑같은 욕망과 고민을 지닌 한 인간으로서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감정이 메말랐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렇게 됐습니다. 원래 예민하기도 하고 감정과잉이 있어서 늘 애쓰기는 합니다. 예전에는 눈물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수년 새 많이 달라져 버렸습니다. 눈물이 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어제 조합에서 구로 유배지 촬영을 왔었습니다. 양효경이 울었습니다. 한참 울었습니다. 말을 하다가 같이 울었습니다. 저는 제 눈물샘이 작동한 걸 그 순간에는 느낄 수 없었습니다. , 효경도 우는구나. 김민식이 인터뷰하다가 자주 울었습니다. 송출실에 같이 근무할 때 즐겁기만 했던 김민식입니다. 김민식의 웃음과 비현실적인 울음이 너무 급격하고 진폭이 커서 조울증 같다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말이 많은 양효경도 늘 즐겁게만 보였던 김민식도 감정을 상실해가는 저도 정상이 아닙니다. 상처 입고 불행해진 인생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비슷합니다. 사람도 비슷합니다. 누구에게나 물욕과 명예욕이 있습니다. 이익과 손해를 쉽게 분간할 줄 압니다. 그럼에도 지난 9년간 자기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 상처를 입은 기백 명의 동지들에게 피붙이 이상의 깊은 연민과 애정을 느낍니다. 이익과 회유와 암담한 현실에 끝내 굴복하지 않고 오롯이 스스로 자존을 지켜낸 인간 각자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밥상을 차려주는데 자리에서 일어선 이들을 존중합니다. 숟가락을 들어 밥을 먹으며 마치 모래알을 씹는 것 같았다거나 밥을 먹고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거나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살다 보니 나쁜 놈은 늘 나쁜 놈입니다. 이익을 좇는 이들은 늘 이익을 좇습니다. 악은 늘 더 큰 악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살아남고 이익은 더 큰 이익을 좇아 움직이는 게 생리입니다. 악이 더 부지런하고 이익에 더 전전긍긍합니다.

 

저는 김재철의 농간으로 갑자기 특별채용이란 이름으로 돌아왔습니다. 호봉도 근속도 날려버린 불명예와 치욕의 귀환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자 혼자 다짐했습니다. 딱 한 번만 더 싸우자. 저들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서라도 이길 수 있다면 가자. 그래도 안 되면 미련 없이 MBC를 떠나자.

 

촛불과 탄핵과 정권 교체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수구 세력의 집권연장 가능성이 절반쯤이라도 있었다면 그랬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 있었겠습니까? 저는 견디고 살아남는 자들만의 처절한 싸움만이 기다리고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차피 죽음만이 남아 있었을 테니까요. 정권교체가 없었다면 이우환 피디는 스케이트장에서 해고됐을 것이고 양효경과 김수진은 유배지와 변방을 떠돌다가 회사를 떠나야 했을 겁니다. 김민식 또한 드라마 곁에도 가지 못하고 해고되거나 떠나야 했을 겁니다.

 

김장겸이 그랬습니다. 낭만적 파업이라고. 우리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기 때문입니까? 잠을 못 자 약을 먹고 동료가 떠나가는 것을 가슴 찢어지게 바라봐야 했던 이들의 피맺힌 절규가 장난처럼 보였단 말입니까? 낭만처럼 보였단 말입니까? 독해집시다. 처절해 집시다. 싸움은 지고도 승리하기도 하고 이기고도 패배하기도 합니다. 저는 지난 두 번의 파업은 지고도 이긴 것이라 생각합니다. 싸워야 할 때 피하지 않고 싸웠기 때문입니다. 끝내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싸움은 이기고도 패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어진 판이기 때문입니다. 처절하지 않으면 지는 겁니다. 철저하지 않으면 지는 겁니다. 타협하면 지는 겁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 되면 지는 겁니다. 우리 안의 적폐를 청산하지지 못하면 지는 겁니다. 부끄럽더라도 힘을 냅시다. 그리고 우리 MBC의 영광을 땀흘려 재현해 냅시다. 그것이 오늘의 이 상황을 만들어준 국민의 명령입니다."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