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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글/생각

떨리는 가슴

칸나일파 2017. 10. 3. 02:08

MBC 드라마 리즈시절이던 2000년대. 주말 저녁 시간대는 대체로 가족드라마가 대세였다. 2005년 드라마 편성이 빵꾸나서 임시로 때우려고 제작한 옴니버스 드라마 <떨리는 가슴>을 감옥에서 봤다. 채널 선택권도, 심지어 TV를 끌 권한도 없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드라마를 못 봤을 것이다. 그렇게 보게 된 이 드라마가 내 인생 최고의 드라마다.

부모님 없이 큰 자매 배두나(동생)와 배종옥(언니), 배종옥의 남편 김창완은 모두 드라마 속에서 실명으로 나온다. 배종옥과 김창완 사이에서 자란 딸 보미 역은 고아성. 김창완의 남동생이었다가 MTF로 성전환한 김혜정 역에는 하리수가 나온다.

이 드라마는 등장인물과 배경은 끝까지 똑같지만 매주 2회씩(토/일) 주인공이 바뀌는 형식을 취한다. 주제어는 모두 '사랑'이다. 1, 2화는 이혼한 배두나가 다시 사랑에 빠지지만 상대 가족의 반대를 극복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이야기. 3, 4화는 성전환을 한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가족이 다시 마음을 열어가는 이야기. 5, 6화는 사춘기 소녀 보미 첫사랑 이야기. 7, 8화는 홍대에서 롹밴드하는 최강희랑 바람나는 김창완 이야기. 9, 10화는 예전 사랑했던 사람과 너무 닮은 사람을 만나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배종옥 이야기. 11, 12화는 집 나갔다 20년만에 돌아 온 두 자매 엄마 김수미 이야기.

똑같은 구성 안에서 매주 주인공을 바꾸고, 사랑이라는 큰 주제 안에서도 다양한 변주를 시도하고, 이 다양성을 끌어내기 위해 매주 작가와 연출도 바꾸는 신선한 시도를 했다. 그 결과 전체가 빛나면서도 각기 독립적인 스토리 하나 하나를 잊을 수 없는, 엄청난 명작이 탄생했다. 그 가운데도 11, 12화는 인정옥 작가가 대본을 써서 대사 하나 하나 가슴에 꽂힌 말들이 많았다.

12화에, 한참 일진들에게 삥 뜯기며 맞고 다니는 보미를 보며 김수미가 위로(?)를 하는 장면이 있다. 남편에게 심하게 매를 맞으면서도 자매를 보호하려 했던 김수미가 던지는 대사라 그 말 하나 하나가 단순하게 들리지 않았다. (사실 이보다 훨씬 찐~~한 대사가 많지만 혹여나 내 글 읽고 찾아볼 사람에게 스포일러가 될까 그냥 남겨두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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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왜 이렇게 작살이 났어? 싸웠어?
..
맞았어?
...
나도 많이 맞았다. 
누구한테요?
근데 너 어디가 제일 아프든 애기야
여기요. 근데요 목도 따가워요. 여긴 안 맞았는데. 
그치 여기 목 여기가 꽉 조이는 것처럼 아프지?

그래 원래 그래. 맞은데가 아픈 게 아니라 여기 목소리 나오는데 여기 여기 여기가 제일 그렇게 아프다. 요기가. 
간지러워요. 
가만있어봐. 이렇게 웃으면서 풀어야 해. 안 풀면 목 막혀. 목 막히면 인생 막혀.
또 맞을지도 몰라요. 
도망가야지. 
도망가다 맞은 거에요. 
또 도망가야지. 너 맞는 거 겁나서 죽치고 있으면 목 막혀 또. 맞짱뜨지 못할 거면 줄창 도망쳐. 언젠가는 잘 도망칠 날 있어. 
그래도 무서워요. 맞을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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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을 볼 때마다 고등학교 때 생각이 났다. 사설독서실에서 라면 먹고 들어오다 골목에서 얻어 맞은 적이 있다. 당연히 도망가지 못했다. 물리적 폭력에 대한 두려움은 10대 내내 중요한 화두였다. 나는 이에 대한 해법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2005년 당시 저 메세제는 이렇게 들렸다.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만이 용기는 아니다. 출소 후에 30대 내내 돈을 벌게 될 것이란 직감을 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됐다. 몇년 단위로 고민해봐야 해결되는 문제도 없고, 이룰 수 있는 성취도 없고, 삶의 조건도 그다지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래서 십년이 지난 후 그림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게 잘 도망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더 큰 행복을 위해서. 진짜 도망가는 게 아니라 현명하게 다른 길을 찾아가는 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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